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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

🥤 빨대의 구멍은 몇 개 일까?

by 개발자 진개미 2023. 12.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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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단

퇴근 길에 블라인드를 보던 중 흥미로운 인기글을 봤습니다. 바로 빨대의 구멍은 몇 개 인가라는 글이였는데요. 댓글에서는 예상대로 뜨거운 논쟁이 벌어지고 있었는데, 댓글의 반응을 요약하면 크게 4가지로 갈린거 같아요.

  • (이유없이) 1개/2개다
  • ~한 이유로 1개/2개다
  • 위상수학적으로 1개다
  • 구멍의 정의는 ~하고 빨대는 이 정의에 부합하지 않아서 구멍이 없다

 

쓸데없어 보이는 논쟁이지만 사람마다 답이 갈린다는게 신기했고, 또 제가 생각하는 답은 댓글에 없어서 정리해서 적어보면 재밌을 거 같아 제 생각을 적어보게 됐습니다!


제 자신의 배경 소개

후광효과를 바라고 하는건 아니고, 어떤 배경과 경험을 했냐에 따라 답이 달라질 거 같아서 제 자신을 간단히 소개하겠습니다. 빨대 논쟁(?)에서 유효한 제 경험은 2가지 인거 같아요.

  • 수학과를 3학년까지 마쳤다
  • 철학에 관심이 조금 있다

위상수학적 접근?

저는 수학과임에도 위상수학적으로 빨대의 구멍은 1개라는 말에 전혀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이 발언이 말이 되려면 일단 구멍의 정의를 위상수학에서 사용하는 정의 그대로 따른다고 합의를 하고, 또 그 정의가 의미가 있어야 겠죠.

무슨 말인가 하면, 신촌역과 강남역의 거리를 물어보는데 위상수학적으로는 아무 의미도 없다고 했다고 해 봅시다. 이 발언은 사실입니다. 근데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거리의 정의와 위상수학에서의 거리의 정의는 매우 다릅니다. 위상수학적 거리의 개념이 도움이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지하철 노선도 같은 경우가 그렇겠죠. 

수학의 모든 분야는 연구대상을 한정시키기 위해 특정 공리를 따르게 하고, 그 이외의 모든 사실은 자유에 맡겨 버립니다. (의미 없게 만들어 버립니다.) 그리고 특정 상황에 어떤 공리를 선택할지 (수학 분야를 선택할지)에 따라 그 분야의 관심사는 달라집니다.

그렇다면 위상수학의 관심사는 뭘까요? 위상수학은 연속적인 변화에서 보존되는 공간의 본질적인 성질을 연구하는 학문입니다. 이 관점이 빨대 논쟁에서 유효한 관점은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맞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는 구멍은 1개라고 결론 내릴 수 있겠죠!


자연어의 모호함

자연어 (영어, 한국어, 일본어 같은 사람이 쓰는 언어)는 매우 모호합니다. 같은 말이라도 상황에 따라, 말하는 억양에 따라, 지역에 따라 의미하는 바가 다릅니다. 뿐만 아니라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합니다. 

이런 특성 때문에 어떤 단어가 어떤 의미인지 다투는 소모적인 논쟁은 의미가 없습니다. 중요한건 내가 이 단어를 사용했을 때 어떤 의미로 말한 것인지 추가적인 설명을 하면 될 뿐입니다.

그렇다면 빨래 논쟁에서도 구멍을 어떤 의미로 쓴지 설명 (정의)하면 끝나겠네요! 아쉽게도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애초에 구멍을 정의할 수 있을까?

빨대가 구멍이 2개라고 해 봅시다. 직관적으로 말이 안 되진 않죠. 들어가는 곳이 2개니 구멍도 2개다! 그렇다면 빨대의 길이를 점점 줄여서 1cm, 1mm, 1nm까지 줄여도 구멍은 2개일까요? 그래도 2개라고 한다면 모든 고리도 구멍이 2개인가요? 이건 직관적으로 말이 안 되고,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는 정의에도 맞지 않습니다.

반지같은 고리의 구멍이 2개?

반대로 빨대가 구멍이 1개라고 해 봅시다. 그럼 아무리 늘려도 구멍은 1개입니다. 그렇다면 출입구가 각각 1개씩인 동굴의 구멍도 1개인가요? 이것도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는 구멍의 정의와 맞지 않습니다.

동굴의 출입구가 1개라면 아무리 떨어져 있어도 구멍이 1개?

그렇다면! 사전을 찾아보면 되지 않을까요? 

네이버 사전 "구멍"

이건 더욱 더 이상합니다. 뚫어지거나 파내지 않고 생긴 구멍은 구멍이 아닐까요? (뚫다 / 파다를 어떻게 정의할 지는 일단 넘어갑니다... 🥲) 애초에 어떤게 구멍인지 판단하는데 그게 어떻게 만들어졌는지까지 봐야 하는게 좀 이상하지 않나요? 우리는 일상에서 전혀 그러지 않는데요. 그럴 수 밖에 없습니다. 사전을 사실 단어를 정의하는게 아니라, 단어의 가장 일반적인 사용법들을 묘사하는 거니깐요.


언어가 무언가를 묘사할 수 있다고 해서 그게 의미가 있는건 아니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 루트비히 비르겐슈타인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것들 중에 실제 세상의 의미있는 무언가를 묘사하는 건 매우 일부분입니다. 언어로 묘사할 수 있고 직관적으로 말이 된다고 해서 그게 의미있는 논쟁이나 정해진 답이 있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유니콘을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유니콘은 그냥 뿔이 달린 말입니다. 직관적으로 충분히 있을 법 하고, "유니콘"이라는 단어도 있고, 또 유니콘을 묘사할 수도 있습니다. (심지어는 유니콘을 꽤 현실감있게 그려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누군가가 유니콘이 날 수 있을 지 논쟁을 시작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일단 유니콘은 없습니다. 유니콘이 없는데 유니콘이 날 수 있는지 각종 근거를 들어 얘기해 봤자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유니콘은 조금 극단적인 예시기는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현재도 직관적으로는 말이 되지만 엄밀히 따지고 보면 말이 안 되는 것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말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는 예술을 할 수는 있지만 학문적으로는 침묵하는게 최선 아닐까요?


요약

너무 장황하게 말했지만 저의 생각을 3줄 요약해 보면 생각보다 간단합니다.

  • 우선 구멍을 정확히 정의하고 합의해야 한다
  • 근데 언어로 무언가를 묘사할 수 있다고 해서 그게 실세계의 의미있는 무언가의 실존을 보장하는건 아니다
  • 구멍도 비슷하게 우리가 관념적으로 대충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엄밀히 정의할 수 있는 대상은 아니다 (유니콘 같이 있을 법 하지만 실제로는 없는, 그래서 논의 자체가 의미가 없는 대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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